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막부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막부
안녕하세요. 오늘은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막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1868년에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아시의 패권자로 등장합니다. 이와 더불어 도양도 서양과 마찬가지로 문명의 혁신을 이르킬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며, 당시 낙후되었던 동양의 각국에 활로를 제시 했습니다.
본론으로 메이지 유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본다면, 19세기 중후반에 중국의 아편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던, 서구 열강은 어느새 일본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도쿠가와 막부는 문호를 개방하자는 지식인들이 요구를 묵살하고 쇄국정책을 고수 했다. 그러나 서남 지역의 번을 중심으로 지식인들의 새로운 사상이 퍼지며 막부 타도운동이 일어 났다.
이 운동의 결과 2백여년 동안 일본을 통치한 도쿠가와 막부가 실각하고 중앙집권 형태의 새로운 정권이 탄생한다. 새 정권에서 군왕으로 추대된 메이지천황은 뛰어난 지략과 원대한 포부를 갖추었을 뿐아니라, 혁신 사상으로 무장한 인물이였다. 그가 45년에 걸쳐 추진한 개혁정치가 바로 메이지 유신이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일본은 서구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할 만큼 크게 성장을 한다.
메이지 유신의 가장 근본적인 개혁은 번 제도의 폐지와 토지 반환 정책실시라고 할수 있는데, 천왕은 번주에게서 토지와 그 토지에 귀속된 사람들에 대한 소유권을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직위를 해제하고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추방했다.
그들의 직무를 대신할 인물들은 천왕 자신이 직접 임명했다. 이러한 조치로 메이지 천왕은 지방세력을 모두 제압하고 통일된 중앙집권 정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자신의 뜻을 신뢰하는 신하로 조직을 더 강하게 만든것이다. 곧이어 중앙 관리의 임면권도 천황에게 귀속시켜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로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마침내 근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했다. 번주에게서 박탈한 토지는 국가에 귀속시키고 토지의 매매를 금지했다.
그러나, 국가에 일정한 세금을 납부하면 자유롭게 토지를 사용하거나 양도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나서 경제를 발전시켜 부국 강병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에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이르킨다는 뜻의 식산흥업 정책을 추진했다. 초기에는 먼저 국가가 세수로 국영 공장을 설립하여 모범을 제시하고, 개인의 창업을 고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후에 개인 기업들이 대거 등장했다. 메이지 정권은 국가의 권력을 바탕으로 바존주의 개혁을 실시하며 경젤ㄹ 더욱 발전시키며 기반을 다졌다.
경제가 발전하자 정치 문화에도 변화가 생겼다. 기존에 유교, 불교 사상이 차지했던 자리에 서구 문명과 사상이 밀려들어왔고, 새로운 교육 체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은 경제부국이 되는 것만으로는 완벽한 강국이 될수 없다고 판단하고 막강한 군사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1873년부터 일본 징병제를 실시하고 "군인칙유"를 반포해 천황에게 충성하고 무사도 정신으로 단단하게 무장한 군대를 양성했다.
마침내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아시아의 패권자로 등극했다. 이와 더불어 동양도 서양과 마친가지로 문명의 혁신을 이르킬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며 당시 낙후되었떤 동양의 각국에 활로를 제시했다.
메이지 유신 정부가 영향을 미친 사례로 캉유웨이, 량치차오가 주축이 되어 전개한 중국의 변법유신 운동을 꼽을 수 있다.